[정치시평]‘공정한 사회’의 조건

출처 : 내일신문 칼럼
게제 일시 : 2010-09-13

‘공정한 사회’의 조건
박명호 (동국대 교수 정치외교학)
 

9월초 대학은 바쁘다. 개강과 수강신청, 정정 등등. 캠퍼스는 새 학기 새 희망을 안고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개강 첫 주에 담당한 수업 중 하나를 분반(分班)하게 되었다. 수강신청을 받아보니 내가 진행하고자 하는 수업형식에 알맞은 인원수를 초과했기 때문이다.

80명 전후의 학생들을 두 반으로 나누었다. 그런데 분반기준이 문제였다. 입학연도를 기준으로 나눌 수도 있고, 전공을 분반기준으로 적용할 수도 있다. 내 경우는 전공을 분반기준으로 선택했다. 학생들의 전공은 통상 분반 필요가 있을 때 적용하는 일반적 기준이기도 하다. 따라서 정치외교학 ‘전공’학생과 정치외교학 ‘복수전공’ 학생을 구별하여 반을 나누었다.
 
전공과 복수전공 학생을 차별한 ‘분반’

그러자 일부 학생들이 항의성(?) 전화를 해왔다. 특히 복수전공 학생들의 불만이 많았다.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반이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그 학생들 입장에서 보면 수업 ‘선택권’을 제한받은 의미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원칙적으로 보면 학생들의 이의제기가 맞다. 분반과정에서 정치외교학 복수전공 학생들이 차별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별은 불가피하다. 정치외교학 전공의 전임교수가 전공과목을 강의할 때 정치외교학 전공학생과 정치외교학 복수전공 학생을 놓고 분반하라고 하면 ‘당연히’ 정치외교학 전공학생을 우선 선택하는 것이 맞다. 즉 분반 과정에서 정치외교학 전공 학생들에게 ‘특혜’를 주게 된다.

따라서 분반 과정에서 발생한 ‘차별’은 합리적인 것이다. 항의성 전화를 해온 학생들에게 원칙적으로 전공학생을 우선하고 여유자리가 있을 때 복수전공 학생을 배려할 수밖에 없다는 설명을 했더니 대부분 수긍했다. 물론 이와 같은 선택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벌어지지 않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유감스럽게도 현실은 정반대다.

그렇다면 왜 차별해야만 하는가? ‘희소성(稀少性)’ 때문이다. 무언가를 원하는 사람의 수가 줄 수 있는 것보다 많다면 누군가를 불가피하게 차별해야 한다. 바로 ‘희소자원의 권위적 배분’이다. 이 과정에서 특혜와 차별이 발생한다. 고위 공무원 자리도 그것을 원하는 사람의 수가 줄 수 있는 자리의 수보다 많다. 당 대표나 최고위원, 국회의원 자리도 그렇다. 정당의 공직후보 공천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원하든 원치않든 우리는 매일 특혜를 받거나 차별을 받으며 생활한다.

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특혜를 받은 사람과 특혜를 받지 못한 사람 모두가 승복할 수 있는 기준이다. 특히 차별을 받는 사람들이 그 기준에 대해 “당연하다 또는 합리적이다”라고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공정하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은 “사회가 정의로운지 묻는 것은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 이를테면 소득과 부, 의무와 권리, 권력과 기회, 공직과 영광을 어떻게 분배하는지 묻는 것이다. 정의로운 사회는 이것을 올바르게 분배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정치에서의 공정성 확보가 공정사회 첫걸음

부, 권력 그리고 기회라는 희소자원을 올바르게 분배하는 것은 누군가를 ‘공정하게’ 차별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되면 차별받는 사람들이 세상을 원망하진 않는다. 속으로는 뭐라 하더라도 당연히 받아야할 차별이기에 동의할 수도 있다. 그래야 공정한 사회다.

공정한 사회의 기준? 복잡하지 않다. ‘장관의 딸’로 태어난 것이 특혜의 이유이고, ‘장관의 딸’로 태어나지 못한 것이 차별의 이유라면 잘못된 것이다. 똑같은 불법이 누구에겐 처벌대상이고 누구에겐 양해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도 잘못된 것이다.

‘희소자원의 권위적 배분’은 정치의 역할이다. 따라서 정치영역에서 먼저 ‘공정성’이 담보되어야 한다. 정치에서의 공정성 확보가 공정한 사회로 가는 첫 걸음이기 때문이다.